다윗은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습니다.(제1독서) 요한 세례자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식별하며, 권력자에게도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하여는 도전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그는 죽임을 당하였지만, 정치적, 사회적 악의 실체를 폭로하는 예언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나라를 통치하는 헤로데 임금의 생활 모습을 보십시오 권력 주변에서 얽히고 설킨 여인들의 질투와 간교한 계략들이 난무하는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의 박근헤,최순실 국정 농단을 보는 것 같습니다.
헤로데는 요한 세례자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허세와 체면 때문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도는 직접 예수님을 심문했기 때문에 그분께 죄가 없으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결국은 죄수인 바라빠를 놓아주고, 무고하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 줍니다.(마르 15,15 참조) 그들의 공통점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 유지와 명성, 대중적 인기와 자존심, 부를 쌓는 일, 그리고 하루 아침에 떨어진 체면 지키기, 이런 것들이 처음엔 자신들에게 발목을 잡는 일인 줄 몰랐을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거나 현재 비판받고 있는 정치 권력가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회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이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힘을 추구하고 체면이나 자존심, 인기에 휘둘려 살다 보면,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됩니다. 본래의 자기 자신은 없어지고 껍데기 인생이 됩니다. 자기 자신의 이런 모습 속에서 사회에 생명이 되는 정의와 평화는 하나둘 그 빛을 잃어 갑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합니다. 헤로데는 겉으로 보이는 체면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는 요한 세례자를 죽여 버리는 아주 못된 왕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자체는 자신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드는 큰 굴레가 됩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라고 말할 정도로 두려움과 후회를 안고 평생을 살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을 드러내려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자유롭게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며,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나보다는 먼저 주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같은 취미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교제로써 축적됩니다. 그리고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칭찬을 더 많이 하고 시기심을 줄여야 합니다.(버트런드 러쎌)
성령님, 이 땅에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게 하소서, 아멘. ------------ 오늘의 강론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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