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곡이 어렸을 적 이른 봄 아침나절이었다. 집집마다 돌며 탁발하던 스님이 율곡의 집에 들러 탁발하면서, 뜨락에 서 있던 다섯 살배기 율곡을 유심히 훑어보더니, 혀를 끌끌 차면서 대문을 서둘러 돌아 나섰다.
그의 어머니가, 스님 등에 맨 바라에 시주를 하면서,그러한 스님의 모습을 보자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탁발을 거기서 끝내고 동구밖으로 걸음을 재촉해 나가던 스님을 불러 세웠다. 그 연유를 묻자, 스님은 한참을 망서리더니, 율곡이 그로부터 백일 안에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만약 그 기간만 잘 넘긴다면, 자라서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며, 재앙을 막는 유일한 방도는, 지금 당장 앞산 골짜기에다 씨밤 백 개를 심고 싹틔워 가꿔, 지금부터 정확히 백일이 되는 날 그 시각까지, 그 밤나무 백주를 모두 다 살려 놓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그날이 되면 꼭 와서, 같이 확인해 주겠노라고도 하였다.
졸지에 태산같은 걱정거리를 떠안은 율곡의 부모는, 그길로 수소문하여 씨알이 굵고 벌레도 먹지 않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알밤 백 개를 급히 구해서, 그가 일러 준 골짜기에 정성껏 심고, 사람이나 어떤 짐승도 함부로 범접하여 밤나무를 다치거나 해치지 못하도록, 심은 지점마다 튼튼한 보호목을 세우고, 밤밭 주변으로는 울타리를 단단히 둘러 치고, 가물때는 물도 주고 잡초도 매 주며, 밤낮으로 애지중지 피땀흘려 가꾸고 지키며 돌봤다.
우리나라 여성 지성의 표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남달리 엉특하던 자기의 어린 아들 율곡을, 그토록 끔찍한 재앙으로부터 기어이 지켜 내고자, 그때부터 밤마다 마당 한 켠에 촛불을 켜고 정한수를 떠 놓고, 마음을 다해 하늘을 우러르며 율곡을 살려 주십사고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로부터 정확히 백일이 되던 날 그 시각에, 예의 그 스님이 율곡의 집에 어김멊이 덩도하자, 율곡의 부모는 스님과 함께 앞산 골짜기로 건너 가서, 백일동안 두 부부가 혼신의 정성을 다해 키워서 지킨 밤나무 백주를, 긴장 속에서 스님과 함께 세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른, 여든, 아흔 일곱, 아흔 여덟, 아흔 아홉...,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간 율곡의 부모가 공들여 가꿔 수백 번을 세었어도, 매번 어김없이 백주이던 밤나무가, 어찌 하필 그 중요한 순간에 딱 한 주가 모자라는, 아흔 아홉 주란 말인가. 한주가 모자라나 열주가 모자라나 약속을 못지킨 것은 매 한 가지였던 것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진 그들이 다시 세고, 또 세고, 몇 번을 더 세어 봐도, 밤나무는 역시 한 주가 모자라는 아흔 아홉 주일 뿐이었다. 이제 율곡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야말로 풍전등화가 됐다.그러자 밤나무 세기를 거듭하다 지친 스님마저, 세기를 그만 포기한 채, 그들을 위로하며 자리를 막 뜨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던 율곡의 어머니가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율곡의 아버지와 스님에게 소리쳤다. "여기 밤나무가 새로 나고 있어요!" 저만치에서 모자라는 밤나무 한 주를 찾고 있던 율곡의 어머니 오른 발치에서, 지금 막 싱싱한 밤나무 새순 하나가 파릇파릇 돋아나며, 다른 밤나무들과 키를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랬다. 부모로서 피땀흘려 노력한 공로와 정성 어린 기도에 감동한 하늘이 율곡을 악의 그늘에서 구해 주고자 악이 없앤 밤나무를 새로 내 주신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 놀라운 광경을 말없이 쭈욱 지켜 보고 서 있던 스님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땀바닥에 나뒹굴더니, 황소만 한 호랑이로 변하며, 마치 원망이라도 하듯 하늘을 향해 크게 두어 번 으르렁거리면서, 동구 밖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로부터 학문을 배워 십 삼 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오늘날 우리 현대 화폐에도 등장하는, 성리학의 거장 이이의 호를, 율곡으로 하였다는 말이 전해 온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이 분명하다.
모처럼 집집마다 온 가족 친지가 한 자리에 모여, 조상께 차례를 모시고 성묘를 드리며, 웃 어른께 세배를 드리는,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 설을 맞이하여, 사랑스러운 우리 자녀들이, 위기에 처하여도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고 정성을 다하며 살아 가는, 설화 속, 한 겨레 선현의 모습을 보며, 각자가 그를 본받아 자기 과업에 더욱더 땀흘려 매진함으로써, 뜻하는 바를 다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