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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박한 현대의 삶 속에서도, 우리는 간혹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하여, 혹은 다른 가족 누군가를 위하여, 다른 남으로부터는 좀처럼 구하기 힘든, 간장이나 신장 등 자기 신체 장기 일부를 기증하여, 그것을 간장이나 신장에 이식시킴으로써 난치병을 치유하였다는 미담을 들으며 흐뭇해 하기도 한다.
천구백육십일 년도, 그러니까 중학교 이학년 때였던가, 내가 다니던 중학교가 있던 소 도시가, 몇 시간동안 시간당 이백 밀리미터 이상의 집중 호우가 쏟아지자, 갑자기 불어난 강수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물이 가득 고인 고지대의 저수지 뚝이 터지는 바람에 한꺼번에 그 큰 봇물이 시내를 휩쓸어 버려서, 다소간 높은 곳에 자리해 있던 우리 학교와 같은 곳은 피해가 적었지만, 시내 저지대의 주택가 대부분이 모두 수몰되는 끔찍한 수재를 당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곤히 잠자던 한 밤중에 일어난 사태라서,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순식간에 덮친 수마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수해를 당했었는데, 그로 인해 도시 전체가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었음은 물론, 주민 수백명이 일시에 목숨을 잃은 참상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우리학교 재학생 가족도 여럿이 변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마음을 유독 아프게 하였던 것은, 우리가 평소 그분의 학식과 덕망을 깊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연세가 지긋하시던 국어 담당, 김 암룡 선생님이, 당신 따님을 잃으신 사연이었다.
그 따님은 우리가 다니던 남학교 인근 여자중학교 삼학년이었는데, 나는 직접 본 기억은 없었지만 듣기로는, 가인박명이라고, 학교 성적이 뛰어났을 뿐더러 아주 예뻤으며, 선생님 따님답게 무척 착했다고들 하였다.
그날 밤, 전기가 나간 그 먹통같은 어둠 속에서 목에까지 차 오르던 흙탕물을 헤치며 가족들을 한 사람씩 이끌어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이동시키며 임시방편으로라도 버티도록 피신시키시던 선생님은, 이미 기진맥진하였으나, 마지막 남은그 딸과 당신만 대피하면 되었으므로 혼신의 힘을 다 하셨는데, 자기 차례를 다른 가족에게 양보한 그 따님 차례가 되자, 물은 불행히도 갈수록 더 불어나기만 하였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 따님이, 자기는 자기 아버지 뒤에서 아버지의 허리춤을 잡고 따를테니, 아버지는 뒤는 신경쓰지 말고 앞서서 가시기만 하라고 하여, 선생님도 그렇게 하셨으나, 두 부녀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지쳐버린 두 사람은 불어나는 급물살을 거스르며 좀체 앞으로 나아 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버지를 붙잡고 있던 그 따님이 급기야 황급히 아버지를 부르며, 자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는 물론, 불안하기 짝이 없이 일시 대피중인 다른 가족의 안위마저 위태로우므로, 자기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젊은 힘이 있으니, 어떻게든 따로 물살을 헤쳐 아버지를 따라 올라 갈테니, 자기는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우선 아버지라도 얼른 먼저 대피하시라며, 선생님이 그 따님을 돌아다 보며 어떻게 붙잡고 저지할 틈도 주지 않고, 그 때까지 부여잡고 있던 자기의 생명줄과도 같은 아버지의 허리춤을 그냥 맥없이 놓아 버리더란 것이다.
그길로 그 따님은 다른 아무 것도 다시는 붙잡지 못한 채 속절없이 그냥 급류에 휩쓸리며, 아래로 떠내려 가 버렸다고 한다.
그 따님의 순간적인 희생적 결단을, 생사가 급박하게 교차되던 아비규환의 그 와중에 있던 선생님으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막아낼 방도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하신 순식간의 일이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당신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따님을 선생님보다도 먼저 그렇게 저 세상으로 보내신 것이다.
하얀 피부에 깡마르신 작은 키였지만, 음성이 유난히 맑고 우람하였으며, 이지적이면서도 사랑이 가득 담긴 큰 눈망울을 두꺼운 뿔태 안경 속에서 빛내시며, 꿈많던 우리 농촌도시 빡빡머리 소년들에게, 애송하시던 서정 넘치는 소월의 시를 낭랑히 암송해 주기도 하시던, 그 선생님은 그러나, 그리도 큰 슬픔을 겪고 나신 후 단 한 번도, 결근은 물론 결강도 안하셨으며, 당신의 소중한 따님을 잃은 아픔을 조금도 드러내는 일이 없이, 한결같이 의연하신 스승의 모습으로 교단을 지키셨으며, 그 후로도 여전히 우리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셨다.
그 당시엔 너나없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문중 항렬에 맞춰 자기 자식 이름을 짓던 때였는데,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훨씬 더 전에 벌써, 그때 초등학교 육 학년이던 당신 아드님 이름을 "어진이"라고 지어 부르시며 우리를 감탄케 하셨으니, 선생님은 그때부터 이미 우리말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선각이기도 하셨다.
우리는 그때 그렇게 간 그 선생님 따님을 일컬어,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며 못내 애석해들 하곤 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리도 존경하던 그 선생님 교육을 그렇게 받고 자란 나는 과연, 벌써 장성해버린 내 자식들이, 자기들을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들"이라는 수식어로 일컬어도 좋아할 만큼, 그 선생님처럼 그렇게 잘 살아 왔는지를 조심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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