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겨울 몹시도 춥던 어느 날이었다. 미처 녹지 않은 눈이 얼어붙어 빙판이 진, 동네의 응달 좁은 비탈길은 기름을 쳐 놓은 듯 미끄러웠다.
집사람 안나와 주일 미사를 본 뒤 성당 옆 달동네 가운데로 난 지름길로 여늬 때처럼귀가하던 우리는 그 비탈 위 언덕배기에서 비탈 아래 쪽에 있는 자기집으로 길이 끄러워서 내려오지를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쩔쩔 매고 있던, 장애가 심하여 거동이 무척 불편한, 우리 부부가 종종 보아서 아는, 어떤 형제의 모습을 보았다.
예순을 넘겼음직한 그는 냄새나는 그 달동네의 판잣집에서 혼자 외롭게 살면서, 철지난 남루한 옷을 걸치고 가끔씩 인근 초등학교 앞 출근길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면서,도로를 달리는 차량이나 오가는 행인들을 가만히 구경하거나, 버스를 타고 내리는 승객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소일도 하는 분이셨는데, 우리 부부는 어쩌다 그날처럼 그 형제를 보게되면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소년처럼 부끄러워하며 온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소리없는 웃음으로 우리를 반기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볼 때면, 이 각박한 세상을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다 저 형제처럼만 순수하고 선량하다면 얼마나 좋을까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난처한 그를 본 나는 허겁지겁 내 미사가방을 안나에게 맡기고 서둘러 그에게로 올라갔다. 개신교 교회를 신실히 다니는 그 역시 그날이 주일인지라, 어느 교회에서 예배라도 보고 나오는 듯, 두꺼운 성서와 찬송가를 소중히 가슴에 품은채 두 맨손으로 꼬옥 감싸 쥐고 있었는데, 그 곳에 얼마나 오래 서서 떨었는 지는 몰라도, 안색이 검푸래져 있던 그는, 흡사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우리를 무척이나 반가워 하였다.
그러한 그를 부등켜 부축하고 그와 한 몸이 되어 할머니 걸음을 조심스럽게 반 발짝씩 떼어 놓으며 그 살얼음 비탈길을 내려가 가까스로 그의 집 쪽문 앞에 무사히 모셔다드리자, 그제서야 그는 안도의 숨을 크게 몰아 쉬며, 예의 그 활짝 핀 주름미소와 함께 감사하다며 굽신굽신 인사를 하였다.
그날 나는 그를 부축하면서 나를 바라보던 그때 그의 선한 눈빛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난 봄에 시(市)가, 그 달동네를 헐고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 옆으로 4차선 새 도로를 건설하면서, 수십년간 시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며 못 나가겠다고 버티던그 달동네 주민들에게 몇 푼씩 이주비를 주고 그들을 모두 이주시켜 버렸는데, 그런 이후부터 우리는 인근 버스 정류장 어디에서나, 성당 길 어느 모퉁이에서도 한없이 선한 그 형제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두어 달 전 어느날, 우리 부부가 뇌경색으로 한쪽이 마비가 된 채 지하 단칸 사글셋방에서 어렵게 살아 가시는 예순 다섯 되신 한 장애 자매의 가정방문 기도를 간 적이 있었는데, 그 자매가 살아 온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듣다보니, 공교롭게도 그 자매 역시, 그 달동네에서 우리가 만났던 그 형제와 이웃하며 사시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곳에다가 그만큼이라도 거처를 마련하여 살고 있지만, 그 곳을 떠나온 이래 그 달동네 사람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려서, 어느 누구도 그 형제나 서로의 행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고 하셨다.
다만 그는, 이주비를 더 받아 보겠다고, 욕도 들어 있는 빨갛고 파란 원색 구호의 플래카드며 벽보를 덕지덕지 붙여 놓고, 끝까지 남아서 버티며 시를 상대로 투쟁하던 주민들과는 달리, 책정해 받은 이주비에 그저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어디론가 훌 가셨다는데, 해가 바뀐 요즈음 날씨가 갑자기 이렇게 매섭도록 추워지니, 불현듯 그가 새삼스럽게 게궁금해지고, 적잖이 염려가 된다.
모르거니와 그는 지금 아마도, 그가 살던 그곳보다도 훨씬 더 춥고 험한 비탈길 섶 어딘가에다, 누군가가 내다 버려서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나뒹굴던 판자떼기며 골판지 쪼가리들을 주워 모아서, 그 달동네에서와 마찬가지로 얼기설기 판잣집을 지어 놓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어두운 밤, 호롱불 심지를 돋우며 이 칼날 한파에 시달리면서도, 그날 행여 떨어뜨리기라도 할세라 조심하던 그 성서를 펴 묵상하고, 그 찬송가로 찬미하며, 오늘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는, 기도의 삶을 가지런히 살고 있으리라.
주님은 바로 그와 같은 모습으로 가끔씩, 아니 늘 우리 곁에 오실 것이다. 아마 지금이 순간에도, 이미 우리 곁에 우리의 이웃으로 와 계실 것이다.
두 밀레니엄 전에 우리는, 가족이 모여 음식을 나누는 아늑한 집 안 식탁 주변도 아닌, 마소가 여물을 먹는 한데 헛마굿간 구유 안으로, 한없이 낮게 우리에게 내려 오신 주님을 몰라뵙고, 십자가로 그분을 내몰아서 고통받으며 돌아가시게 하였는데, 오늘날도 우리는, 우리에게 수도 없이 오셨으나 우리보다도 훨씬 더 보잘 것 없는 모습의 주님이시기에, 또다시 몰라뵙고, 그저 얄팍한 우리식 계산으로만 따져 보고서,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다싶어, 습관적으로 그분을 내치며, 두 번 죽이고 있지는 않는 지 곰곰히 생각하면서, 우리 이웃들을 사랑으로 눈여겨 돌아다보자.
겨울 주님은 아마도, 추위에 병약히 떠시는, 몹시도 헐벗고 주리는 우리 이웃의 초라한 모습들이 아니시겠는가.
|